핵심요약
- 일본은 서구 열강을 모방하여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자원과 경제력 부족으로 제국주의 확장을 시도했다.
- 군국주의와 군부 독주가 외교 대신 무력 중심 전략을 낳았다.
-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은 일본의 자원 확보와 중국 지배를 위한 사전 단계였다.
- 미국은 경제 제재로 대응, 일본은 이를 전쟁 명분으로 삼아 진주만 기습을 단행했다.
- 진주만은 전략적 성공처럼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미국의 참전과 일본의 패망을 불러온 결정적 오판이었다.
제국주의를 택한 일본, 근대화의 그림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비서구권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그 내부는 불안정했다. 노동력은 농민 중심이고 자원은 부족했으며, 경제는 외자와 전쟁배상금에 의존했다. 결국 일본은 해답을 제국주의에서 찾았다. 식민지 확보를 통해 자원을 수탈하고, 군수산업을 키워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적 자신감은 극대화됐고,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로 급속히 치닫게 된다.
-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과 산업화
-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서구식 근대국가로 개혁
- 세계 최초의 비서구 산업화 국가로 평가받으며 서구 열강에 필적하는 제국주의 노선에 진입
- 하지만 기술·자본 부족, 경제적 기반 취약, 농민 다수라는 구조적 한계를 가짐
- 해답은 ‘팽창’에 있었다
- 일본은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 확보를 통한 자원 수탈, 군수산업 발전을 통한 경제 부흥을 추구
- 러일전쟁(1904~1905) 승리로 자신감을 얻고, 이후 군사비 과잉 투자를 지속
- 전함, 군수공장, 조선산업 등 중공업 중심의 군국주의 산업으로 재편
미국과의 긴장, 이미 20년 전부터 시작
1920년대 일본은 해군력 강화를 위해 ‘팔팔함대’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경계하며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일본의 해군력 확대를 억제했다. 전함 비율 5:5:3은 일본 국민에게 굴욕으로 받아들여졌고, 반미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은 일본의 이민을 제한하고, 일본은 이에 반발하며 민간 영역까지 적대감을 키우는 심리전에 돌입했다.
- 해군력 증강과 팔팔함대 계획
- 1920년대 일본은 전함 8척 + 순양전함 8척 보유 계획 수립 (팔팔함대 계획)
- 해군이 국가 위신의 상징이던 시절, 해상력 강화는 곧 국력 강화 의미
- 미국의 견제 :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 1921~22년 워싱턴 회의, 일본·미국·영국·프랑스 등 주요국 해군력 제한 조약 체결
- 일본은 전함 건조 비율에서 5:5:3의 불리한 조건 수용 → 국민 반발, 군부 반발 심화
- 영일동맹 해체, 미국 이민 제한 → 일본 내 반미 감정 폭발
만주사변과 중국 침공, 외교 대신 전쟁으로
1931년, 일본 관동군은 만주 철도 폭파 사건을 자작극으로 꾸며 침략을 정당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만주국을 건국했다. 국제연맹은 일본의 침량행위를 규탄했지만, 일본은 오히려 탈퇴를 선언하며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 이후 일본은 중국 본토 침공까지 확대하며 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영향권으로 만들려는 ‘대동아공영권’전략을 구체화했다.
- 만주 침공(1931) : 일본 제국주의의 본격 시작
- 일본 군부는 중국 내 혼란과 군벌 분열을 틈타 철도 폭파 자작극 감행
- 명분은 '치안 유지', 실상은 만주 전면 점령
- 1932년 만주국 건국 → 일본 국토 3배 규모 확보
- 국제사회의 대응과 일본의 고립
- 국제연맹 조사단은 일본의 침략으로 판단
-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1933) → 외교적 고립 심화
- 내부적으로는 '아시아 해방'이라는 선전 논리 확산
일본 정부를 집어삼킨 군부, 쿠데타로 완성된 전시 체제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총리 암살 사건이 잇따랐다. 군부의 반란, 특히 1936년의 2·26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정치권을 완전히 위축시켰다. 민간 정부는 사실상 무력화됐고, 모든 결정권은 군부가 장악한 ‘대본영’체제로 넘어갔다. 이후 일본은 외교보다 전쟁, 대화보다 기습을 택하는 구조로 고착되었다.
- 총리 암살과 청년 장교 쿠데타
- 1930년대 초 : 하마고치 총리·이누카이 총리 암살 → 군부 반발 본격화
- 1936년 2·26 사건 : 청년 장교 1,400명이 일으킨 쿠데타, 실패하나 군부 정치 영향력 극대화
- 군부 중심 전시 체제 완성
- 대본영 체제 구축 : 일본 군사 전략의 최고 결정기구
- 민간정부의 외교·경제 전략은 무력화되고, 일본은 전면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
진주만 기습, 완벽한 작전인가 치명적 착오인가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를 기습했다. 수백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전함 8척 중 4척을 대파했고, 항공기 200대가 파괴됐다. 그러나 결정적 실수는 미국 항공모함이 그날 진주만에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단기적 승리르 거뒀지만, 이 사건은 곧바로 미국의 본격 참전을 유도했고, 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일본의 전략적 포석
- 만주 점령, 중국 본토 침공, 동남아 확장 추진 → 자원 확보가 최대 목표
- 미국이 일본의 전쟁 범위 확대를 우려하여 석유·철·항공유 수출금지 조치
-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 선전포고 없이 미국 해군기지 기습
-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일본 함재기가 전함 8척 중 4척 대파, 항공기 200여 대 파괴
- 하지만 미국 항공모함은 우연히 진주만에 없었고, 이는 훗날 일본에 큰 패착이 됨
진주만 이후, 일본이 잃은 것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미국과의 협상을 완전히 단절시키고, 도덕적 우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전략적 패착을 범했다. 미국은 분노했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수치의 날’연설을 통해 즉각적인 참전을 선언했다. 이후 전쟁은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되며, 일본은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1942년 미드웨어 해전에서의 패배는 일본 해군력의 몰락을 상징하며, 결국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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